- [성경본문] 시편1:1-6 개역개정
-
1. 제일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시1:1-6 “말씀 속에서 일어나는 일” 2022년 1월 9일
저는 시를 좋아합니다. 인사합시다. 당신은 꼭 시인 같아요. ㅎㅎ
●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물음은 좁게 보면 시편 1편의 주제이고, 범위를 더 넓히면 시편 전체의 주제이며, 더 범위를 확대하면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말씀 속에 그 복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복 없는 자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1~3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악인들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즐거워함으로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형통한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과연 위와 같이 완전하게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인간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한두 번쯤은 악인의 꾐에 넘어가기도 하고, 죄인과 함께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두 번이 아니라 우리는 평생을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는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유혹이나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수 없기에 “이 땅에는 복 있는 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실 복 있는 자는 인간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보내시는 그분의 아들이 유일하게 복 있는 자에 걸 맞는 분이십니다.
♣4~6절> 1~3절의 복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악인들은 시냇가에 심겨지지 않았기에 결국 바람에 아는 겨와 같게 됩니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 시편을 보면서 나는 악인의 길로 가지 않고 의인의 길로 가서 형통한 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 이렇게 삽시다!“라고 결론을 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 이렇게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해석을 하고 적용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거의 완벽에 가깝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시편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시편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였습니다.
● 아니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말씀, 즉 율법을 주신 목적을 몰랐던 겁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구약전체를 가장 간단하게 말할 때에 율법이라고 합니다. 세분화하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고, 더 넓게는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이라고 합니다(눅24:44).
그러므로 구약 전체가 율법인데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말씀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라고 주셨는데 나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니까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야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알게 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인간이 죄인임을 알라고 주셨습니다.
갈3:19~22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4)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 곧 구약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둔다는 말씀은 시편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도 죄를 알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내용입니다.
♣3절>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복 있는 자가 된 모습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합니다.
시80:8절>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합니다. 애굽에서 가져다가 약속의 땅에 심었습니다. 이사야 5장에서 포도원의 노래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가져다가 약속의 땅에 심은 것은 좋을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는데 맺힌 것은 온갖 악한 이방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복 있는 사람의 길을 알려주셔도 그 길을 갈 능력이 없습니다.
렘17:9절>“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이러함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믿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위로 자기의 의를 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 시편 1편을 육신의 눈으로 문자대로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적용된 말씀은 자기를 믿는 것이며 육신을 힘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킨다는 자들이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요5:39). 성경을 예수님으로 읽지 않으면?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로 읽지 않으면? 죽은 말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고후3:6절>“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 '의문' 이라는 것은 문자를 말하는 것인데, 아니 왜 문자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왜 문자로 전달하면 안 됩니까? 그것은 바로 문자는 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가지고 오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십자가로 이루셨음을 성령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면서, "~하십시오. ~하지 마십시오." 라고 한다면, 여러분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담 속에 있기 때문에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으로 해야 하는데, 이 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그래서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죽어야 하는데,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서 살게 됩니다.
● 그러면 본문 말씀을 생명의 말씀인 영으로 보아볼까요?
성령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본문 1:1~3절> 이렇게 할 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을 히브리어를 보면 ‘복’은 복수이고 ‘사람’은 ‘그 남자’입니다. 정관사를 붙여서 남성 단수명사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한 분은 사실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생명나무이며 예수님이 생명수가 됩니다. 이 생명을 자기죽음으로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니 시편의 말씀이 예수님이 이루실 것을 지시한 것임을 아는 자가 복됩니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귀한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은 우리와는 좀 더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가 있고, 그 오아시스에 심겨진 나무 한그루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에 참여된 신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4~6절> 악인은 시냇가에 심겨지지 않았기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됩니다. 예레미야 17장을 보면 사람을 믿고 육신을 그의 힘으로 믿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사람을 믿는 다는 말은 자기의 행위를 믿는 자입니다. 이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타작하러 오신 분이라고 합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가라지와 쭉정이는 불에 태우신다고 하였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인들”이란 복수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의인은, 여호와의 관계성 안에 놓인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채찍 맞으심과 굶주림 때문에 상처가 치유되고 배부름을 얻는 자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그 죄와 허물이 사함을 받은 자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복에 동참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악인으로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이 되는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信者)가 된다!! 하나님께서 불법을 행한 우리를 가리워주는 것인데, 마치 도배와 같이 성경에서는 '간과한다', '도말한다' 라고 한다.]
● 시편 1편의 복의 완성은 어떤 모습일까요?
계22:1~5절>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것이 복이 완성된 모습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접붙여진 자들이 참으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수이며 영원한 생명의 열매인 예수님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지금 여기서부터 맛보며 누리며 사는 자들은 십자가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구약의 시편은 공간적이며 상징적이지만, 신약에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롬14:17>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치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소그룹 교제>
1. 오늘 본문 말씀대로 살아서 “복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받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 복 자체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복이 있습니다,
2. 왜 인간 자체는 복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복 있는 사람의 길을 알려주어도 그 길을 갈 능력이 없었습니다.
3. 그러면 오늘 시편 말씀은 왜 주시는 것입니까?
얼마나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으라고!!!
믿으면 복이신 예수님의 생명에 접붙인 바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이 임 합니다.
4. 왜 말씀은 영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루어진 말씀인 성령이 계신가요?
의문(문자,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경우에 성경 말씀은 “내가 이루어야 할” 것 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루는 과정에서 못 이루기에 저주를 받게 되어 죽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으로 임한 영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살과 피가 효험이 되어서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롬8:5-11: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댓글0개